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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주노프 교향곡 1번의 탄생... > LP 이야기

글라주노프 교향곡 1번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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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희영 (222.♡.6.237) 작성일 25-09-04 10:32 조회 37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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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exander Stefanovich Glazunov[Александр Стефанович Глазунов] *

(1865. 8. 10. 상뜨 뻬쩨르부르그 - 1936. 3. 21. 파리<그의 시신은 1972년 레닌그라드로 이장되었다>)

 

 


작곡자, 지휘자 및 교육자. 부유하고 잘나가는 출판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글라주노프는 아주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여 10대가 되기도 전에 개인 피아노 레슨과 작곡 공부를 받게 되었다. 1879년에 발라끼레프를 만난 후 그는 림스끼-꼬르사꼬프에게서의 개인적인 작곡 레슨을 받으며 날로 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것은 1882년 겨우 그가 16세 되던 해에 상뜨 뻬쩨르부르그에서 그의 첫 교향곡이 대단한 갈채를 받으며 연주됨으로써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곧 부유한 상인이었던 벨랴예프는 글라주노프를 자신의 휘하에 두게 되었고 그의 작품들을 출간하고 또한 연주가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그의 이력을 쌓아주기 시작하였다.


글라주노프는 진보적인 벨랴예프 써클의 일원이 되어 이 후원자의 집에서 열리는 음악의 “금요일”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1883년에 글라주노프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나 곧 그만두고 자신의 주된 관심사인 음악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1884년 벨랴예프와 함께 바이마르로 가서 리스트를 만난 후, 글라주노프는 1887년에 니꼴라이 림스끼-꼬르사꼬프와 더불어 보로진의 작품들을 편집, 완성하는데 매달렸으며, 여기에는 미완성의 오페라 ‘이고리 공’도 포함되어 있었다.


곧 글라주노프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어 파리와 런던 등에서 자신의 음악을 지휘해왔으며, 1899년에는 여러 개의 4중주곡과 시곡들, 교향곡들, 그리고 그의 세 편의 발레곡인 ‘라이몬다’, ‘사랑의 계략’ 및 ‘사계(四季)’를 작곡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뜨 뻬쩨르부르그 음악원의 작곡 및 관현악과 교직을 내락받게 되었으며, 소요사태 중에 림스끼-꼬르사꼬프가 쫓겨남에 따라 일시적으로 동조 사직을 하였다가 1905년에는 교장이 되었다. 이 기간동안 그는 대다수의 성숙기 작품들을 썼으며, 여기에는 8번 교향곡과 바이얼린 협주곡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파리와 런던에서 계속적으로 국제적인 공연에 참가해왔으며, 1907년에는 캠브리지와 옥스퍼드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기도 하였다.


새로운 소비예뜨 정책 아래서 글라주노프의 활동 가운데는 국가적인 음악 조직에 참여하는 것과 전통적인 러시아 예술 음악을 초기 소비예뜨 음악가들에게 연결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1922년에 작곡가 데뷔 40주년을 맞아 소련 인민 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그가 음악원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많은 중요하고 지속적인 개선이 이루어졌으며, 혁명 후에도 음악원의 명성이 올라가도록 하였지만, 자신의 작곡 분야에서의 활동은 현저하게 줄어들어 버렸다;학교에서의 진보적 이념에 대한 그의 보수적인 대립은 있었지만, 마찰은 없었다.


그는 1928년에 소련을 떠나 맨먼저 비엔나에서의 슈베르트 탄신 100주년 행사에 참가하였고, 그런 다음에는 음악원으로 계속 복귀하지 않으면서 유럽과 미국까지 지휘를 하며 연주여행을 다녔지만, 음악원과는 계속 연락을 유지하면서 소비예뜨 음악 활동에 공헌을 해왔다. 결국 그는 파리에 정착하여 작곡을 계속하게 되었으며,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서 1936년에 사망하였다.


글라주노프는 거의 모든 장르(‘이고리 공’을 완성시킨 것이 그의 유일한 오페라에 대한 시도여다)에 걸쳐 작곡을 하였다. 그의 주된 영역인 교향곡과 현악 4중주곡 이외에도 그는 발레, 극 부수음악, 교향시곡, 모음곡, 서곡, 협주곡, 합창곡, 가곡, 실내악곡들과 피아노 작품들을 썼다. 하지만 그의 스승이었던 니꼴라이 림스끼-꼬르사꼬프와는 달리 글라주노프는 자신의 가르침이 이어지는 세대에 영향력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인 논문 등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생애 초기에는 러시아 국민주의 악파에 속해있었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음악적 재능이 단순한 민족주의적 의미를 넘어서서 자신의 조국에 있어서의 최고의 작곡 기법과 코스모폴리탄적인 유럽의 최상의 것들을 분명하고 완벽한 러시아적인 관현악법으로 결합을 시키기에 이르렀다.


= A. Ho & D. Feofanov/Biographical Dictionary of Russian/Soviet Composers 


 


한 사람의 업적과 더불어 그의 인간됨이나 관련된 여러 가지 사건들을 가지고서 평전(評傳)을 쓴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 사람에 대한 정리된 자료와 책자가 거의 없다면, 더더욱 그의 생애를 재구성한다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부터 그의 가장 주된 작곡 영역인 교향곡들을 소개하면서 여태껏 우리나라에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던 작곡가인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에 대하여 그의 일생과 사건들, 그리고 작품 세계와 음악적 업적에 관하여 아는 데로 소개를 해보려고 합니다.


그를 여러 차례에 걸쳐 소개하려고 하는 것은, 그만큼 글라주노프란 인물이 소비예뜨/러시아 음악을 소개함에 있어서 중요한 과정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또 그런 만큼 서방 세계에서는 - 개방이 이루어진 이후인 지금까지도 - 폄하되고 제대로 평가되지 않고 있는, 낀 세대의 한 비운의 인물이기 때문에 더더욱 자세한 소개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됩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드리자면, ‘5인조’로 대변되는 강력한 민족주의적 보드까 향과, 좀 더 서구 전통의 음악적 구성에 치중하려는 차이꼬프스끼의 음악이 실제 연주 혹은 음반 업계에서뚜렷한 대비를 보이며 대중들에게 소개되고 있고, 다음으로는 ‘그 이후’의 작곡가들인 라흐마니노프와 스끄랴빈,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소비예뜨 세대인 쇼스따꼬비치나 쁘로꼬피예프, 그리고 하차투리안들의 음악은 활발하게 알려지고 있지만, 정작해서 그 중간의 ‘황금 고리’ 역할을 해주었던 작곡가들에 대하여는 너무나도 관심이 없어왔다고 봅니다.


서서히, 그러나 확고하게 잡혀온 러시아 음악의 전통을 새로운 시대인 소비예뜨 러시아가 요구하는 음악적 행로로 부드럽고 마찰이 없게 이어지도록 하였던 음악가이자 또한 뛰어난 교육자였던 이가 바로 알렉산드르 스쩨파노비치 글라주노프였으며, 바로 그러하기에 모든 러시아 음악가들은 글라주노프에 대하여 빚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오늘날의 무시와 폄하 때문에 이러한 마음의 빚은 더 크게 늘어난 셈이겠지요...)


이제, 격동의 한 시대를 살아왔던 한 천재의 삶을 그의 음악과 함께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글라주노프가 태어난 1865년 무렵에는 러시아의 음악계 역시 태동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1856년부터 62년 사이에 발라끼레프를 중심으로 뀨이, 보로진, 무소르그스끼와 림스끼-꼬르사꼬프가 만나 서로를 격려하고 영감을 나누면서 러시아 민족주의의 음악들을 쓰기 시작할 때였으며, 186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들을 가리켜 ‘발라끼레프 써클’ 혹은 ‘힘찬 소수(могучая кучка)’라 지칭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루빈쉬쩨인 형제 - 안똔과 니꼴라이 - 를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음악가들은 좀 더 서유럽, 특히 독일-오스트리아의 정통적인 음악작곡과 교육을 지향하여 1859년에 러시아 음악협회를 만들고 차이꼬프스끼와 같은 이들을 조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서로간의 반목으로 치닫던 그들의 관계는 차이꼬프스끼가 ‘5인조’를 방문하여 교류를 하기 시작하고, 특히 림스끼-꼬르사꼬프와는 죽을 때까지 경쟁적 친구관계를 유지하게 됨으로써 마침내 진정한, 음악에 있어서의 ‘러시아 전통’이 성립되어가는 도상에 있었고, 그 시기에 글라주노프는 태어났습니다.


글라주노프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이미 1782년에 모스끄바에서 창립되어 오래된, 그리고 알아주는 출판사인 “왕조(династия:The Dynasty)”의 오너였으며, 대문호인 알렉산드르 뿌쉬낀(Александр Пушкин)도 이 출판사를 통하여 자신의 대표작인 ‘예프게니 오네긴’을 출판하였다고 합니다. 출판업 및 서점을 하는, 부유하고 지적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미술이나 음악 쪽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하며, 개인적으로 발라끼레프에게 피아노와 음악 레슨을 받고 있던 글라주노프의 어머니는 그가 13세가 되자 발라끼레프(Милий Валакирев)에게 인사를 시킵니다.


글라주노프의 재눙을 한 눈에 알아본 발라끼레프는 5인조 가운데 가장 어리지만 가장 이론적으로 열심이고 열의에 가득 차 있던 해군 무관 니꼴라이 림스끼-꼬르사꼬프(Николай Римский-Корсаков)에게 그를 인도하였고, 림스끼-꼬르사꼬프의 가르침은 마치 마른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글라주노프에게 전해져서 마침내 림스끼-꼬르사꼬프는 그를 가리켜 “매일매일이 아니라 숫제 매시간 음악적으로 진보한다.”는 말을 털어놓게 만듭니다.

 


1979년부터 1881년까지 체계적인 음악 수업을 림스끼-꼬르사꼬프에게 받은 그는 몇 곡의 피아노 소품들과 가곡들을 쓴 다음, 드디어 본격적인 자신의 영역을 개척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교향악으로서, 그가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고수하며 가지고 간 첫 번째의 것이죠...다른 5인조의 뛰어난 선배, 혹은 스승이 한 곡의 교향곡을 쓰기 위하여 오랜 시간에 걸친 노력을 하였던 것과는 달리, 그는 16세가 되던 1881년에 다소 미흡한 오케스트레이션 부분이 있긴 하지만, 놀라운 음악적 재능의 소유자임을 처음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알리게 되는 교향곡 1번을 완성하여 내놓게 됩니다.


이 총보는 곧 림스끼-꼬르사꼬프를 통하여 발라끼레프와 스따쏘프 등 ‘힘찬 소수’들에게도 보여졌고, 그들에게 엄청난 찬사를 받으면서 검증을 거친 다음, 마침내 1882년 3월 13일의 공개 연주회에서 발라끼레프가 직접 지휘하여 일반인들에게 소개되었습니다.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미지의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청중들 모두는 전 4악장의 질풍과도 같은 충격파를 겪고서 모두들 엄청난 찬사와 환호로 이 곡을 환영해주었습니다. 러시아 민족주의 유파에 경도해있던 이들도, 독일 정통 음악에 경도해있던 이들도 모두 상당한 환호로서 이 뛰어난 작품을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각 악장이 전해다주는 신선함과 소리의 향연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초연에 참석하였던 림스끼-꼬르사꼬프의 자서전인 ‘나의 음악적 생애’와 다른 글에서 그때 그날의 분위기를 대단히 상세히 적어 알려주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젊은 작곡가들과 음악가들, 그리고 청중들 대다수는 들떠서 많은 박수갈채를 보내었다. 하지만 블라지미르 스따소프는 명백히 서구(독일)의 형태를 가진 것이라고 하며 조금 투덜대고 있었다. 청중들이 환호와 갈채를 보낸 것은 이 새로운 음악이 주는 신선한 충격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곧 밝혀지게 되었다. 청중들에게 답례로서 인사를 하러 나온 작곡가는 바로 다름아닌, 아직 학생복을 입고 있는 16세의 소년이었기 때문이었다. 청중들은 모두 더 큰 환호와 박수로서 그를 따뜻이 맞아주었고, 이윽고 모두들 기립하여 환호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연주회가 마쳐지고나서 림스끼-꼬르사꼬프에게 헌정된 이 교향곡에 대하여 다른 암시를 주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부유한 글라주노프의 부모가 이 교향곡을 작곡하기 위하여 다른 작곡가를 고용하였을 거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하지만 글라주노프의 뒤이은 창작물들은 이러한 근거없는 루머를 빠른 시간 내에 잠재우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우리가 또한 사람의 음악적 천재라고 일컬을 수 있는 드미뜨리 쇼스따꼬비치의 첫 교향곡도 19세가 되어 나왔으며, 다른 뛰어난 소비예뜨/러시아의 작곡가들도 20세가 지나서야 비로소 첫 교향곡을 쓸 수 있었던 만큼, 글라주노프의 음악적 재능은 실로 엄청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습작이라는 생각을 전혀 가질 수 없을 만큼 충실하고 꽉 찬 관현악법이나 작곡 기법, 그리고 음악적 영감까지...


어쨌거나 글라주노프는 이 1번 교향곡의 공개초연 이후 러시아를 짊어지고 갈 한 거목으로서 주목받게 되었으며, 스따소프 마저도 “우리들의 작은 글린까”라는 말로서 그에 대한 크나큰 기대감을 걸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 한 사람...글라주노프를 후원하여 결국 러시아 음악의 발전을 일으키게 된 미뜨로판 벨랴예프의 이야기는 다음 순서로 접어두도록 하구요...또한 이 곡은 1884년 바이마르에 머무르고 있던 리스트에게까지 전해져서 그는 이 곡을 연주하였으며, 또한 이러한 예언을 남기게 되었습니다...“전 세계가 이 작곡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이 교향곡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베토벤의 6번 ‘전원’ 교향곡이 지배하는 듯합니다. 싱그럽고 풋풋한 젊음이 전체적으로 가득하면서도 놀라우리만치 유기적인 작곡 기법과 번뜩이는 재능이 도저히 16세의 소년이 쓴 것이라고는 생각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곡입니다. 




( 1 악장 ) - Allegro


대단히 화사한 봄의 풍경을 관현악으로 합창을 하듯 시작합니다. 들뜬 듯한 첫 주제의 제시 이후 두 번째 주제는 클라리넷과 바순으로 나타나며, 전체적인 곡의 전개는 고전적이고 공식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어 상당히 고심하여 만든 이조(移調)의 전개부를 지나 다양한 관현악법을 선보이면서 강조적인 마지막 코다로 들어간 다음, 관악기의 두터운 음향으로 1악장을 마무리합니다.



( 2 악장) - Scherzo:Allegro 


저음현과 바순이 노래하는 다 장조의 민속무곡풍 반주부를 중심으로 비올라와 클라리넷이 주제를 연주합니다. 러시아 교향악의 스케르초는 약간 어두운 듯 민속무곡조의 음조를 바탕에 깔고서 날아가듯 몰아치는 전개되는 것이 특징인데, 이러한 기본적인 특징을 바탕에 깔고서 이 1번 교향곡부터 글라주노프는 자신만의 소리를 실은 스케르초 악장을 드러내어 보이고 있습니다. 


트리오 부분은 내림가 조로 바뀌면서 명백히 폴란드 내음이 가득한 민속무곡의 리듬과 선율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 3 악장 ) - Adagio 


느린 악장은 사 단조로 바뀌어 조금 우울하고 느릿한 클라리넷과 바순의 음형으로 시작됩니다. 이 어두운 듯한, 그리움이 들어찬 음조는 역시 슬라브적인 것으로서, 결코 직접적인 리듬과 테마로 나타내기 보다는 나름대로 풀어 섞어 쓰는, 그만의 또하나의 특징을 드러내어 보이기 시작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 4 악장) - Finale:Allegro 


피날레 악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이 됩니다. 그리고 폴란드 선율이 악장을 주로 이끌고 가고 있습니다. 끌어당김 리듬의 반주 속에 비올라와 클라리넷으로 시작되는 폴란드 주제는 오보에로 전해져서 이어지며, 강력한 중간 부분의 전개부에서는 주제를 뒤틀거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바꿈을 하며 발전, 전개를 해나가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매우 행복에 가득한 충실한 화음 위로 화사한 주제가 울려퍼지면서 멋진 마무리를 합니다. 


 


한때는 정말 구하기가 힘든 글라주노프의 교향곡 음반들은 최근 조금씩 그에 대한 새로운 재평가와 재조명으로 인하여 여러 회사에서 시리즈 음반들이 속속 나오고 있는 듯하며, 앞으로도 좀 더 많은 음반들이 나오길 기대해봅니다.


가장 오래된, 전통의 교향곡 및 관현악곡 시리즈는 역시 뭐니뭐니해도 멜로지야에서 나온 음반들일 것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전곡집을 녹음한 것은 블라지미르 페도세예프(Владимир Федосеев) 지휘 소련 방송 교향악단인 것 같습니다. 보리스 하이낀이나 꼰스딴찐 이바노프, 나딴 라흘린 같은 콘서트 전문 지휘자들도 몇 곡씩은 녹음을 남기고 있지만, 처음으로 교향곡을 모두 녹음하여 음반으로 남긴 것은 페도세예프인 것 같습니다.


페도세예프의 소련(모스끄바) 방송 교향악단 연주는 1982년 녹음이 둘 있습니다. 2,3악장의 시간은 비슷하지만 1악장과 4악장의 시간은 현저히 차이가 나는 것이 특징인데, 하나는 실황 연주, 하나는 스튜디오 녹음인 듯 합니다.


어쨌거나, 조금 아쉬움이 남는 것은 다른 색채적인 음악들은 뛰어난 생생함으로 우리들을 이끌어주고 있는 반면, 이 1번 교향곡은 어쩐지 조금은 퍼석한 느낌이 든다는 생각입니다...화사하고 가벼운 듯 하면서도 합창을 하듯 시작되는 부분부터 명징함이 떨어지면서 깨끗하고 깔끔한 맛이 부족한 듯한 연주입니다. 교향악적인 구성을 생각한 면은 정확하고 좋지만, 정말이지 시셋말로 2%가 부족한 것이 이러한 것일는지요......

 


 

두 번째 전곡 시리즈는 예프게니 스베뜰라노프(Евнкеий Светланов)가 소련 국립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남긴 것입니다. 참으로 뜻밖인 것은, 그가 남긴 멜로지야 CD 글라주노프 관현악 전집에 실린 연주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포효하고 굵고 거친 듯한 힘의 소리가 아니라 참으로 섬세하고 부드러운 연주를 들려준다는 것입니다.


80년대 후반에 녹음된 것이라 그런지 스베뜰라노프도 매우 진득하고 부드럽게 마치 면발을 뽑듯 연주를 들려주고 있는데, 참으로 뛰어난 에스프리를 뜻밖에 들려주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만, 워낙 구하기가 어려운지라 아쉬움이 많습니다.

  


80년대 초,중반에 나온 또하나의 주목할만한 시리즈는 Orfeo에서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 밤베르크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만든 네메 예르비(Neeme Järvi)의 글라주노프의 교향곡 시리즈입니다. 예의 중후하고 교향악적인 단단한 울림은 여기서도 들을 수 있지만, 스베뜰라노프와 같이 강하고 세고 거친 해석보다는 부드럽고 우미한 후기낭만적인 에스프리에 초점을 맞추어 연주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시 예르비다운 튼실한 교향악적 울림을 바탕으로 비교적 부드럽고 우아하게 곡을 이끌어 나가면서 종래의 선입견을 없애주고 있는, 호연입니다. 지금도 구할 수 있는 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습니다만, 폐판되었을 가능성도 큽니다.

  


가장 최근의 연주들로서 눈에 띄는 것은 알렉산드르 아니씨모프(Александр Аниссимов) 지휘 모스끄바 교향악단의 젊은 소리입니다. 낙소스에서의 강력한 뒷받침으로 이젠 러시아의 중견 지휘자급으로 올라서기 시작한 지휘자 그룹 가운데 주목할 만한 사람이 아니씨모프입니다.


초기에는 조금 퍽퍽하고 자신의 맛을 느끼기 힘든 연주를 들려주었지만, 요즘은 강하지 않으면서도 러시아적인 감각을 충분히 살려주는, 객관적이고 깔끔한 연주를 들려주고 있는 지휘자입니다. 1번 교향곡 역시 예르비나 스베들라노프처럼 굵고 호방함을 바탕에 깐 연주는 아니지만, 젊고 신선한 느낌을 지속적으로 전해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바탕분석이 이젠 그의 냄새를 느낄 수 있는 연주입니다. 결합된 4번의 연주도 상당히 좋습니다.

 


 


이외에도 BIS에서는 일본 지휘자 타다아키 오타카(たた゜あき おたか)와 웨일즈 BBC 교향악단을 써서 전곡집을 녹음하여 내놓기 시작하고 있는데, 1번은 아쉽게도 구할 수 없어서 못들어 봤지만, 2,3,7번을 들어본 바로 설명하자면, 대단히 착실한 영국 교향악단의 전통적으로 자신있는 러시아물에 후기 낭만적인 자신감 있는 해석과 일본인 다운 깔끔함이 약간은 모자라는 듯하면서도 꽤 괜찮은 연주일 것 같다는 추정을 해봅니다.


이밖에 ASV에서도 글라주노프 전곡집이 나와있다고는 하나, 우리나라에서는 주문수입을 하지 않는 이상 구하가 어려워 들어보질 못했습니다.


우리가 16세 때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이러한 성과는 과연 그가 천재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일까요? 음악을 들으시면서 한번쯤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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